지난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디지털 분야 규제를 단순화하겠다는 새 제안을 공개했다. 이번 규제안에는 작은 규제안이 여럿 담겨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EU가 추진해온 논란 많은 AI 관련 규제의 일부 조정과 GDPR 개정이다.
이번 규제 간소화의 배경에는 EU가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깊은 우려가 깔려 있다. 혁신과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문제 제기 역시 정당한 지적이다. 1년 전 유럽중앙은행 전 총재 마리오 드라기가 EU 상황에 대한 ‘충격 보고서’를 내놓으며 논쟁에 불을 붙였고, 이번 집행위 발표에서도 드라기의 이름이 여러 차례 언급됐다.
기술 담당 집행위원 헨나 비르꾸넨은 기자회견에서 “마리오 드라기가 1년 전에 ‘지금 아니면 없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지금 아니면 없다’는 상황이다”라고 강조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규제 완화
강한 표현을 사용했지만, 기대한 만큼 EU의 분위기를 뒤바꿀 조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 규제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고위험 AI 관련 핵심 규정 상당수는 최소 1년 연기됐는데, 이는 불확실성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키우는 조치다. GDPR은 개인 데이터를 AI 학습에 사용할 수 있음을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는데, 집행위 설명에 따르면 유럽사법재판소가 밝힌 입장을 반영한 수준이다. 한편, 스웨덴 개인정보보호청(IMY)은 이런 변경 사항을 “중대하다”고 평가했다.
이 밖에 데이터 규칙 간소화, 사이버보안 보고 절차 단순화, 여러 EU 회원국에서 비즈니스를 전개하려는 기업을 위한 디지털 기업 지갑 등도 포함됐다. 웹사이트의 쿠키 팝업도 줄어들 전망이다. 많은 시민에게는 반가운 조치겠지만, EU의 경쟁력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새 제안에는 벌써 비판이 쏟아졌다. ‘빅테크에 굴복한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발표 직후 구글, 아마존, 애플, 메타를 회원으로 둔 로비 단체 CCIA는 이메일 성명을 통해 이번 조치가 “너무 약하다”고 주장했다.
비르꾸넨 집행위원은 기자회견에서 “이번 패키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해관계자도 있을 것이고, 과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균형 있는 조치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유럽 기술 산업의 더 넓은 위기
필자는 이번 집행위 제안을 니클라스 젠스트룀의 벤처캐피털 아토미코(Atomico)가 이번 주 발표한 연례 보고서 ‘유럽 기술 산업 현황’ 보고서와 함께 읽어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토미코의 보고서는 매년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통계를 담지만, 올해는 정치적 메시지에 가까운 강한 문제 제기가 포함됐다.
아토미코가 강조하는 ‘강력한 기술 생태계 구축 방안’은 AI법이나 GDPR과 같은 대규모 규제와 거리가 있다. 스타트업 규제·행정 부담을 줄이고 혁신 기업의 실패 리스크를 완화하는 이른바 ‘28번째 조항(28th Order)’ 도입이 오히려 가장 절실한 입법 과제다.
스타트업 이해관계자는 아토미코 조사에서 데이터 규제나 AI 규제가 큰 장애 요소라고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장 파편화, 세제 규정, 자본 접근성, 노동 규제 등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투자자의 경우 ‘엑시트 기회 부족’이 대표적 고민이다.
이처럼 EU의 디지털 경쟁력 해법으로 ‘기술 특화’ 입법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위험하다. 더 중요하거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과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아토미코가 강조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유럽의 낮은 자기 확신’이다. 필자도 여러 차례 지적한 내용이다. 유럽 기술 생태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고 업계의 낙관론도 지난 10년 중 최고치지만, 여전히 ‘유럽에서 세계적 기술기업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 이가 부족하다.
아토미코는 “이는 구조적 문제의 신호다. 유럽은 창업자, 투자자, 공공·민간 금융기관 등 내부의 이해관계자를 향해 ‘세계 최고 기업을 만들 최적의 장소는 유럽’이라는 확신을 완전히 심지 못했다. 집단적 자기 확신이 없으면 아무리 대담한 목표도 일정 수준 이상 나아가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집행위의 새 규제 패키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dl-ciokorea@foundryco.com
Read More from This Article: 규제 완화 나선 EU의 IT 산업, 다시 한 번 ‘지금 아니면 없다’
Source: New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