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배송을 핵심 경쟁력으로 삼으려면 단순히 인력과 자본을 투입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주문부터 배송까지 전 물류 과정에 고도의 기술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약속된 시간에 정확한 새벽배송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은 컬리를 비롯해 소수에 불과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컬리가 하루에 처리 가능한 주문량은 물류센터당 수십만 건에 이른다. 새벽배송 주문의 대부분이 오후 11시 직전인 밤 시간대에 집중되는데, 고객과의 약속된 배송 시간을 지키려면 최소한 새벽 1~2시까지는 물류센터에서 상품을 출고해야 한다. 오픈마켓의 경우 개별 판매자가 각자 제품을 포장하여 발송하지만, 컬리와 같은 직매입 이커머스는 여러 제조사가 만든 다양한 제품을 보관해 두었다가 고객의 주문에 따라 박스에 담아 배송한다. 서로 다른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정확하게 한 바구니에 담고, 박스에 포장하고, 이것을 다시 지역별로 분류해, 배송하는 작업 자체가 매우 복잡한 과정이다. 무엇보다 엄청난 양의 주문을 단시간에 처리해야만 한다.
대규모의 복잡한 물류 작업을 종이 목록을 사용해 일일이 확인하고 처리한다면, 새벽배송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새벽배송 서비스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물류 설비가 자동으로 상품을 선별하고 포장 방법을 결정하는 등 기존 물류센터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자동화 기술이 반드시 갖춰져야 한다. 이는 곧 아무리 많은 인력을 투입해도 정교한 자동화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새벽배송이라는 혁신적 서비스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컬리는 사업 초기부터 이런 빠른 배송이 핵심 비즈니스 가치라는 걸 인식하고 기술에 적극 투자해왔다. 고객의 주문을 처리하는 앞단 시스템부터 물류의 최적화와 자동화를 담당하는 뒷단 시스템까지 기술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물류 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은 컬리의 풀필먼트프로덕트본부가 전담해 관리하고 있다.
컬리처럼 많은 기업이 기술로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지만, 경기 침체기에는 이러한 시도를 실행하기가 여의치 않다. 오히려 기술 투자는 불황기에 가장 먼저 축소되는 대상이 되곤 한다. 흥미롭게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IT 투자를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생각이 시장을 지배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기업이 뚜렷한 방향성도 없이 투자를 결정했다. 무작정 개발자를 뽑고, 깊이 있는 사업 철학 없이 그저 남들 이 하니까 따라하는 식으로 IT 투자를 진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급한 결정이 불황과 맞물리면서, 현재 많은 기업에서 IT 투자는 물론 관련 사업까지 전면 취소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나마 활발하게 투자되고 있는 영역은 생성형 AI가 아닌가 싶다. 생성형 AI는 인터넷, 스마트폰처럼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올 기술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생성형 AI 기반 기술을 직접 개발하거나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엄청난 자원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AI 기술을 단순히 도입하고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AI 기술의 단순 도입과 활용에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다른 기술 투자가 어느 정도 투자 대비 수익을 예측할 수 있다면, AI는 도입 비용은 크지만 실제 효과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생성형 AI를 무조건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생성형 AI이든 다른 기술이든,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 솔루션 같은 기술은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기술 도입은 각 부서와 비즈니스의 고유한 특성에 맞게 차분하고 신중하게 검토돼야 한다.
컬리는 생성형 AI를 내부 업무에 폭넓게 도입하며 효과를 보고 있고, 사내 교육과 해커톤을 통해 구성원의 관심을 끌어내고 아이디어를 모으는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딥러닝과 머신러닝 기술도 문제 성격에 맞게 적절하게 접목하는 중이다. 유행에 휩쓸려 과한 기대를 갖고 지나친 투자를 하거나 비관하며 무관심하기보다 적절하게 도입하고 활용하려는 것이다.
현재 IT 업계는 투자와 채용이 동시에 위축되는 소위 ‘IT 겨울’로 접어들었다. 내년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침체기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안겨줄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IT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비즈니스 성장 방안을 차분히 고민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현황을 점검하며, 핵심 역량 강화에 집중해야 할 때다. 반대로 이미 확고한 철학을 바탕으로 기술을 도입한 기업은 다가올 불황기에 기술이 비즈니스에 가져다주는 가치를 입증할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박성철 컬리 풀필먼트프로덕트본부 본부장 겸 데이터그룹 그룹장은 30년간 개발자로서 개인 사업, 대기업, 스타트업을 두루 경험하며 개발자, 리더, 회사 대표 역할을 수행했다. 디지털 기술을 사용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좋아해서 현재는 컬리에서 물류를 혁신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전에는 우아한형제들에서 AI 추천 배차 시스템을 만들고 ‘배민 커넥트’ 및 ‘비마트’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이 외에도 개발 커뮤니티에서 집필, 번역, 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정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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