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O는 지난 10여 년간 디지털 전환을 주도하며 기업 내 위상을 크게 높여왔다. 이제는 단순히 IT 전략을 넘어서 비즈니스 자체를 바꾸는 데 기여하는 역할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네트워킹 솔루션 기업 주니퍼 네트웍스(Juniper Networks)에서 이러한 역할을 실현하고 있는 CIO가 바로 샤론 맨델이다. 맨델은 주니퍼가 기존의 스위칭 및 라우팅 제품 중심 구조에서 AI 네트워킹 기업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맨델이 5년 전 주니퍼에 합류했을 당시, 회사는 와이파이 품질 보증 솔루션을 제공하는 미스트 시스템즈(Mist Systems, 이하 미스트)를 인수한 상태였다. 이 인수를 통해 주니퍼는 대학 캠퍼스나 지사 사무실 등 중소 규모 네트워크 환경을 겨냥한 시장에 본격 진입했으며, IT 인프라에 AI 기술을 적용할 수 있는 기반도 함께 마련했다. 이후 미스트는 통합 관제, 자동화, 인사이트 제공 기능을 갖춘 AI 기반 클라우드 플랫폼으로 발전했으며, 주니퍼의 전체 제품을 연결하고 관리하는 중심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됐다고 맨델은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주니퍼의 영업 프로세스는 대형 고객을 대상으로 한 장기적인 계약 위주로 설계돼 있었다. 반면, 미스트는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제품을 묶어서 판매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맨델은 이러한 비즈니스 간의 엇박자를 해소하기 위해, 비즈니스 부문과 기술 부문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조율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맨델이 “업무 시스템 전반에 걸쳐 변화를 필요로 하는 비즈니스 전환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라며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IT 프로젝트가 아니라 협업이 필수인 팀 스포츠에 가깝다. IT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으며, 영향을 받는 모든 부서의 리더와 전문가가 함께 나서야 가능한 일”이라고 언급했다.
서비스 기반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고 맨델은 설명했다. 우선 협업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시스템과 도구를 선정해 도입했다. 예를 들어, 세일즈포스의 영업 기회 관리 시스템을 수정하고, 클라리(Clari)를 활용한 새로운 예측 방식을 도입했으며, 오라클의 CPQ 시스템을 재설계하고 SAP의 주문 관리 시스템도 업그레이드했다.
맨델은 “지금은 모든 시스템이 진정한 엔드투엔드 워크플로우로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다”라며 “그 결과, 파트너와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속도도 크게 빨라졌다. 제품 번들을 중심으로 한 표준화된 영업 프로세스를 뒷받침할 수 있게 됐고, 이는 특히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기술만 바뀐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 운영 방식 전반을 바꾸는 근본적인 변화였기 때문에 비즈니스 전환이라고 표현했다”라고 전했다.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맨델은 기존 IT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맨델은 “기능별로 분리된 IT 팀 체계를 해체하고, 비즈니스 기능을 중심으로 구성된 제품 운영 모델로 전환했다”라며 “이러한 크로스펑셔널(교차 기능) 팀을 구축해 변화에 발맞췄다”라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제품 개발 방식을 전환했다. 맨델은 “기존의 워터폴 방식에서 벗어나, 스프린트 기반의 민첩한 개발 방식으로 바꿨다”라며 “2주마다 데모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는 방식으로, 훨씬 통합적이고 반복적인 프로세스를 만들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기술 기업의 CIO는 일반 산업의 CIO와는 접근 방식이 다르다. 특히 주니퍼 네트웍스처럼 기술에 정통한 내부 전문가가 많은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맨델은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라며 “막상 CIO 역할을 직접 해보면 생각보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기술 중심 기업의 CIO는 다뤄야 할 기술과 시스템의 범위가 훨씬 넓기 때문에 더 복잡한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맨델은 “공학자로 일할 때는 특정 도구와 기술에 집중하면 됐지만, CIO는 제품의 비전을 실제 사용자 경험으로 실현해야 하는 자리”라며 “그 사이의 간극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라고 말했다.
클라우드 네이티브와 AI의 시너지
맨델의 전임 CIO는 아마존웹서비스(AWS) 기반으로 클라우드 전환을 추진했으며, 고객 요구에 따라 구글 클라우드와 애저도 부분적으로 운영해 왔다. 또한 SAP 애널리틱스와 스노우플레이크를 데이터 아키텍처에 도입하고, 일부 업무 프로세스에는 머신러닝도 활용했다.
이 같은 클라우드 네이티브 기반은 AI 네트워킹 전략을 빠르게 추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맨델은 전했다. 네트워크 상태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제품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고객이 직접 업그레이드를 인지하거나 반대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반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클라우드 네이티브 구조 덕분에 주니퍼는 네트워크 상태를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고, 문제 발생 전 사전에 조치하거나 헬프데스크에 문의가 접수되기 전에 사용자에게 알릴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고 맨델은 설명했다.
맨델은 “AI 기반 정보 수집과 분석은 중단 없는 네트워크 운영과 적은 현장 출동을 가능하게 만든다”라며 “이러한 제어 지점을 클라우드에 두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주니퍼에서 맨델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인수한 여러 회사를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예를 들어, 미스트의 와이파이 보증 솔루션은 유선 네트워크로까지 확장돼, 주니퍼의 스위칭 포트폴리오 전반에 AI 기반 기능을 적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맨델은 설명했다. 또한 128 테크놀로지의 SD-WAN을 주니퍼 플랫폼에 통합했으며, 최근에는 소규모 인수 기업의 NAC 기능까지 미스트 클라우드에 내장했다. 아프스트라(Apstra) 인수를 통해서는 데이터센터 네트워킹 역량을 강화해, 고객에게 더 향상된 가시성과 손쉬운 업그레이드를 제공하고 있다.
맨델은 사내 IT팀이 자사 제품의 최대 고객이자 실험 대상으로, 내부에서 먼저 기술을 테스트하며 시장에 내놓기 전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맨델이 이끄는 주니퍼 네트웍스의 IT팀은 자사 제품의 초기 혁신 기능을 가장 먼저 테스트하고, 제품 개발팀에 기술적 피드백을 제공하며,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는 등 내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제품을 사용하는 핵심 사용자 역할을 하고 있다.
주니퍼는 자체 MPLS 네트워크를 온프레미스 환경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맨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정도 규모의 기업으로서는 이례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덕분에 내부 및 외부 IT 전문가 약 600명이 주니퍼의 제품 개발팀과 직접 협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있다고 맨델은 전했다.
맨델은 “네트워킹 기업에서 일하는 장점 중 하나는 언제든 엔지니어링팀과 직접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언급했다.
이 같은 기술과 비즈니스의 긴밀한 협업은 미스트의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맨델은 주니퍼 내에서 기술 조직과 비즈니스 조직이 유기적으로 협력하게 되면서 “미스트는 눈에 띄게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맨델은 “미스트의 주요 차별점은 검증된 마이크로서비스 클라우드 아키텍처 위에 구축됐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세계 최대 규모의 리테일, 헬스케어, 대학, 엔터프라이즈 조직이 요구하는 탄력성, 복원력, 성능을 충족시킬 수 있다”라며 “미스트는 여러 퍼블릭 클라우드에서 운영돼 고객이 보안 또는 규제 요건에 따라 유연하게 선택할 수 있다. ‘AI 네이티브’라는 수식어는 단순한 마케팅 문구가 아니라, 우리가 더 나은 네트워킹 경험을 제공하는 근간이 되는 핵심 원칙”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HPE는 140억 달러에 주니퍼를 인수하려는 계획을 추진했으나, 미국 법무부가 이를 거부했다. 현재 HPE는 이 결정에 항소한 상태이며, 최종 합병 마감 기한은 2025년 10월이다.
이와 관련해 맨델은 당분간 미스트의 AI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전했다. 맨델은 “법적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비즈니스 운영에는 전혀 차질이 없다”라며 “기존 방식대로 계속 운영을 이어갈 것이며, 엔터프라이즈와 통신사, 클라우드 고객을 위한 AI 네이티브 혁신에 집중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시장조사기관 IDC의 수석 리서치 매니저 브랜든 버틀러는 주니퍼가 AI 네트워킹에 일찍이 집중한 점이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버틀러는 “주니퍼는 애초부터 플랫폼 내부에 AI를 자연스럽게 통합해, 미스트 운영의 복잡성을 줄이고 네트워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나 문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고민해 왔다”라며 “미스트 플랫폼은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버틀러는 “시스코와 HP도 AI를 도입하고 있지만, 주니퍼는 AI를 마케팅 전략과 시장 접근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라며 “모든 것이 AI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라고 분석했다.
생성형AI의 적용
주니퍼는 내부 운영과 제품 모두에서 생성형AI를 적용하고 있으며, 이 기술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사내적으로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코파일럿, 깃허브 코파일럿, 카피AI(Copy.ai) 등의 도구를 다양한 부서에서 활용하고 있다. 마케팅 부문에서는 사용자 행동 기반으로 콘텐츠를 자동 생성하고 맞춤화하는 데 생성형AI를 사용하고 있다. 또, 영업과 고객지원 부서에서는 RFP(입찰요청서) 초안을 작성하는 데 특화된 생성형AI 서비스를 활용해 효율성과 확장성을 높이고 있다.
제품 문서화에도 생성형AI가 쓰인다. 제품 사양을 바탕으로 문서 초안을 생성하고, 이를 사람이 다듬어 교육 자료로 완성한다. 여기에 다국어 음성 트랙이 포함된 비디오 모듈도 함께 제작된다.
외부 고객을 위한 지원에서도 생성형AI가 적용되고 있다. 맨델은 “고객지원 챗봇의 기반 기술로 생성형AI를 사용해 문서나 지식 베이스 접근을 더욱 간편하게 만들었다”라고 밝혔다. 주니퍼의 AI 어시스턴트 ‘마비스(Marvis)’는 이미 10년 넘게 자연어 처리 기술을 적용해왔으며, 최근에는 생성형AI를 추가해 기능을 더욱 확장하고 있다.
맨델은 “고객은 더 빠른 문제 해결과 직관적인 셀프서비스 경험을 통해 혜택을 얻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맨델은 아직 주니퍼 제품 자체에 생성형AI가 일반 소비자 애플리케이션처럼 필수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고객이 생성형AI 워크로드(학습, 추론, 스토리지 클러스터 등)를 운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맨델은 “우리는 다양한 산업의 생성형AI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현재 주니퍼는 ERP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고려하고 있으나, 맨델은 ‘에이전틱 AI’의 발전 흐름을 좀 더 지켜본 뒤 결정을 내릴 계획이다.
맨델은 “아직 결정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 에이전틱 AI 시대의 ERP는 지금과 전혀 다른 형태일 수 있다. 우리는 아직 탐색 초기 단계에 있다”라며 “현재는 주요 ERP 벤더의 로드맵을 검토하고 있으며, 핵심 트랜잭션 시스템과 병행해 작동할 수 있는 에이전틱 플랫폼을 대상으로 개념 검증을 시작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 맨델은 “이 분야의 아키텍처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충분히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하고자 한다”라고 전했다.
끝으로 맨델은 “우리가 실제 키보드를 두드릴 즈음이면 에이전트 기반 시스템이 훨씬 일반화되어 있을 것이다. AI는 이러한 전환을 가속화할 수 있다”라며 “우리는 ERP가 어떻게 진화할지에 대한 고정된 틀에 갇히기 전에 미리 대비하고 싶다. 지금처럼 기술 발전이 빠른 시대에는 몇 년 뒤의 모습이 지금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므로,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어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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