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환 칼럼 | 변화의 바람에 맞설 것인가? 따를 것인가?

1990년 1월 전문 컴퓨터 기업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국내 SI 선두기업, 벤처기업, 중견 IT회사를 거쳐 제철회사에서 CIO 역할로 15년을 보냈다. 그리고 경력의 황혼기에 새롭게 IT 회사를 창업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에 참여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36년의 기간이 어찌 감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 긴 여정을 돌이켜 보면, IT 업계야 말로 변화의 속도가 빠른 분야 중 하나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변화 속도가 빠른 IT 분야에 몸담게 된 것이 매우 만족스럽던 신입사원 시절을 시작으로, 클라이언트-서버 등장 후 SI 프로젝트의 폭발적 성장기, 웹 브라우저의 탄생, 인터넷 시대의 개막, 닷컴 부흥기와 버블 붕괴, 모바일 세상의 등장과 클라우드의 탄생 그리고 인공지능의 본격적인 확산까지, 주요 IT 분야 변화의 바람과 수많은 벤처기업(지금은 스타트업이라는 용어가 더 익숙하지만)의 등장과 성장 및 쇠락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일부 관여하기도 했다.

지금도 IT업계는 빠른 변화의 상징이다. 한 달이 멀다고 새롭게 등장하는 인공지능 모델의 발전과 이를 기반으로 한 놀라운 응용 영역의 확장은 물론이고, 양자 컴퓨터 기술, GPU 기반의 컴퓨팅 인프라 발전 및 이와 관련하여 세계 각국의 사활을 건 경쟁이 뜨겁다. 챗GPT의 등장 이후 생성형 AI의 발전 속도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으며, 메타버스, 블록체인, 웹 3.0 등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업계 전체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IT 분야에 있는 엔지니어들은 항상 변화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몇 년 후에도 유효할까?”, “새로운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장 트렌드에 맞춰 커리어를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특히 젊은 개발자들의 경우 이런 불안감이 더욱 심각하다. 개발자 커뮤니티나 SNS에서는 매일같이 새로운 프레임워크,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발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FOMO(Fear of Missing Out) 현상이 IT 업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과연 모든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까?

이러한 소위 변화의 바람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까? 크게 2가지 극단적인 접근법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얼리 어답터’ 접근법이다. 변화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술 영역을 계속 바꿔 나가는 방식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즉시 학습하고, 프로젝트에 적용해 보고, 관련 커뮤니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런 접근법의 장점은 새로운 기회를 빨리 포착할 수 있고, 혁신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문가 고수’ 접근법이다. 이러한 바람과 무관하게 현재 자신의 업무 영역에 대해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심화시키는 방식이다. 한 분야에서 깊이 있는 전문성을 쌓아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접근법의 장점은 안정적인 커리어 경로를 가질 수 있고, 특정 분야에서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접근법 모두 극단적일 때는 문제가 생긴다. 첫 번째 접근법의 경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쫓다 보면 어떤 분야에서도 깊이 있는 전문성을 갖지 못할 위험이 있다. 마치 우물을 여러 개 파다가 어느 것도 물이 나올 만큼 깊게 파지 못하는 상황과 같다. 두 번째 접근법의 경우, 너무 한 분야에만 매몰되다 보면 시장의 변화를 놓치고 결국 도태될 위험이 있다.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필자가 바라보는 변화에 대한 이상적인 대응은 ‘자신의 강점을 가진 영역을 기반으로 특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의 적용을 시도해 보는 것’이다. 변화의 바람을 거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휩쓸리는 것은 더욱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접근법의 핵심은 ‘기반’과 ‘확장’의 균형이다. 먼저 자신이 이미 잘하고 있는 분야, 또는 자신에게 적성에 맞는 분야에서 탄탄한 기반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 기반 위에서 새로운 기술들을 접목해보고, 응용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이터베이스 전문가라면 전통적인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먼저 쌓은 후, NoSQL, 빅데이터, 실시간 데이터 처리 등의 새로운 기술들을 자신의 기존 지식과 연결시켜 학습하는 것이다. 웹 개발자라면 기본적인 웹 개발 원리와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탄탄한 기초를 갖춘 후, 새로운 프레임워크나 개발 방법론을 적용해보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첫째, 안정적인 커리어 기반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둘째, 기존 지식과 새로운 기술을 연결함으로써 더 깊이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셋째, 새로운 기술을 학습할 때도 기존의 지식 기반이 있어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

새로운 IT 기술이 등장하고 각광을 받게 되어도 이런 기술은 반드시 캐즘(chasm)의 시기를 거치게 되고, 이후 점차 실질적인 기술로 자리 잡게 되며 이후 기존의 기술들과 융합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제프리 무어가 제시한 기술 수용 생명주기 이론으로 잘 설명될 수 있다.

모든 신기술은 혁신가와 얼리 어답터들이 먼저 받아들이고, 이후 얼리 매저리티, 레이트 매저리티를 거쳐 라가드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확산된다. 문제는 얼리 어답터와 얼리 매저리티 사이에 존재하는 ‘캐즘’이다. 많은 기술들이 이 캐즘을 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이런 사례들을 무수히 많이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의 닷컴 버블 시기에 등장했던 수많은 기술들과 비즈니스 모델들 중 상당수가 캐즘을 넘지 못하고 사라졌다. 최근에도 블록체인, 메타버스 등의 기술들이 초기의 과도한 기대 이후 캐즘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도 향후 어떻게 현실에서 적용될지 충분한 시간을 통해 지켜볼 필요가 있다. 너무 성급히 최신 기술만 쫓게 되면 들인 노력에 비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기술을 아예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되, 성급한 판단은 피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소위 ‘일만 시간의 법칙’과 같이 어떤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려면 충분한 시간을 해당 분야에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콤 글래드웰이 제시한 이 개념은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가 수준에 도달하려면 최소 10,000시간의 의도적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IT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프로그래밍 언어 하나를 제대로 마스터하려면, 데이터베이스 설계와 최적화를 능숙하게 하려면, 시스템 아키텍처를 설계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루아침에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IT 분야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영역에서 충분한 수준의 경험과 능력을 확보할 때까지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여기서 ‘충분한 수준’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최소한 해당 분야에서 기본적인 문제들을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이런 접근법을 적용할 수 있을까? 몇 가지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핵심 역량 파악과 강화이다. 자신이 현재 가장 잘하는 것, 그리고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명확히 파악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스킬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프로젝트 관리 능력 등도 포함한다.

둘째, 인접 기술 영역으로의 점진적 확장이다. 자신의 핵심 역량과 관련된 주변 기술들을 하나씩 학습해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엔드 개발자라면 프론트엔드, 데브옵스, 클라우드 등으로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셋째, 지속적인 학습 시스템 구축이다.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정기적으로 파악하고, 그 중에서 자신의 핵심 역량과 관련된 것들을 선별하여 학습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정기적인 기술 블로그 구독, 컨퍼런스 참여, 온라인 강의 수강 등의 형태가 될 수 있다.

넷째, 실무 적용을 통한 검증이다. 새로 학습한 기술은 반드시 실제 프로젝트에 적용해 보고 그 효과를 검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해당 기술의 실용성과 자신에게의 적합성을 판단할 수 있다.

36년간의 IT 업계 경험을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변화와 안정의 조화’의 중요성이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변화에 맹목적으로 휩쓸려서도 안 된다. 자신만의 견고한 기반을 구축하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전문가로 성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뻔히 ‘꼰대’ 소리를 듣게 되겠지만 술자리에서 ‘나 때는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했던 것처럼, 경험이 주는 통찰은 분명히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 경험을 고집으로 굳히지 않고, 새로운 세대와 새로운 기술에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IT 업계의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하라. 남들이 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 하려 하지 말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라. 그리고 그 길에서 꾸준히 전진하되, 주변의 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여라. 그것이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IT 전문가로 성장하는 길이다.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지혜’다. 언제 변화를 받아들이고, 언제 현재에 집중할지를 판단하는 지혜.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일관되게 행동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바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IT 전문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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