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AI 솔루션을 도입할 때 일반적으로 마주치는 걸림돌은 무엇일까? 흔히 비용 대비 수익(ROI) 및 사용 사례 확보, 올바른 사용을 위한 직원 교육, 내부 저항 해소, AI 거버넌스 확충 등의 과제가 제시된다.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면, 당초에 기대하던 수준의 AI 역량을 갖추기가 쉽지 않음을 체감하기 십상이다. 이를 위한 해결책으로 일명 ‘AI 프로젝트의 통번역가’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가 있다. 바로 유한킴벌리 AI&디지털 액셀런스 센터(ADC)의 배현정 센터장이다. 그는 “유한킴벌리에서는 AI 전문 조직이 일종의 통번역가 역할을 맡아, 모든 부서와 직급을 아울러 AI 가치를 발굴하고 지원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AI 기술과 트렌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통번역가’가 조직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낯선 여행지에 처음 방문했을 때,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언어에 능통한 동행인이 있다면 안심할 수 있다. 또한 그럴 때 여행지에 더 쉽게 적응하게 된다. 배현정 센터장은 AI&디지털 엑셀런스 센터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며, “매일 쏟아지는 산업 움직임을 빠르게 접하고 IT와 데이터 지식기반 가치실현 기회를 발굴해, 듣는 이의 직급, 부서에 맞춰 변화 관리 지침을 적절하게 제공하는 ‘통번역가’가 있어야 조직이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AI 전문 조직이 필요한 이유
통번역가에 비유하긴 했지만, ADC에서 하는 일은 사실 굉장히 방대하다. 현재 ADC는 AI&디지털 전략 기획부터 사용 사례 발굴, 직원 교육, 실질적인 비즈니스 성과 측정과 솔루션 개발까지 모두 소화하고 있다. 거버넌스에 따라 올바르게 AI를 사용하도록 가이드하고 환각과 같은 성능 문제를 다루는 관리 업무만 해도 벅찰 수 있지만, ADC는 시장 변화를 감지하고 전략을 세우는 등 AI와 관련한 대부분의 전략과 과제를 해결하는 ‘최전선 부대’로 활약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배현정 센터장의 이력이다. ADC를 이끄는 그는 마케팅 인텔리전스 전문가로 2016년 처음 유한킴벌리에 합류했다. 그가 AI&디지털 조직을 이끌게 된 배경은 유한킴벌리 내 마케팅 부문의 중요성 때문이었다. 유한킴벌리는 티슈에서부터 물티슈, 기저귀, 생리대까지, 매일 사용되는 일용 소비재(FMCG) 상품으로 소비자와 만나는 기업이다. FMCG 분야에서는 제품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녹여내는 역량은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소비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를 알기 위해서는 마케팅뿐만 아니라 세일즈의 시야도 필요하다. 이런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유한킴벌리는 일찍부터 마케팅과 세일즈의 디지털화를 추진해 왔다. 이미 오프라인 진열대를 넘어 디지털 공간의 소비자 행동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마케팅 및 세일즈와 빅데이터를 전략적으로 융합했다. 생성형 AI가 부상한 뒤 AI가 소비자 경험을 혁신하고 업무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확인한 기업은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전문 조직인 ADC를 2022년 출범했다.
AI CoE와 차별화된 유한킴벌리만의 ADC
하지만 AI 전문 조직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어떤 직원을 팀원으로 구성할지가 관건이었다. 현재 ADC는 마케팅 인텔리전스, 세일즈 인텔리전스, IT 엔지니어링과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문가들이 소속된, 일종의 ‘교차 기능팀(Cross Functional Team)’이 됐다. 이를 통해 여러 분야의 인사이트와 다양한 관점을 확보하고 있다. 배현정 센터장에 따르면 유한킴벌리 ADC는 각 현업 부서의 업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가들이 의견을 공유하는 방식을 따른다. 즉, 실무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해결하고 니즈를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ADC에서 IT는 현업 전문가들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평가하고 구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배현정 센터장은 현업 부서가 중심이 되는 구조가 다양한 솔루션을 민첩하게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러 배경을 가진 전문가들이 모인 조직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많은 과제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우선 팀원들 간 신뢰 관계가 중요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서로를 믿지 못하면 다양한 시각 자체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수직적인 조직 구조에서는 좀처럼 효율을 높이기 어렵다. 배현정 센터장은 “직책이나 호칭을 부르는 대신 ‘님’으로 통일하고 있다. 센터장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활용할지 계속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은 얽매여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교차 기능팀에 필요한 또 다른 요소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팀원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리더의 역량이다. 배현정 센터장은 과거 IT 대기업의 빅데이터 부문에서 여러 테크니션, 데이터 과학자, 컨설턴트와 함께 일한 바 있다.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맞아 코칭하고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해야 했던 당시의 경험이 ADC를 구축하는 데 유의미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지원에 팀원들의 열의가 더해져 ADC는 이제 막 3년 차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조직으로 거듭났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문가들이 모여 AI에 집중한다는 점은 최근 많은 기업이 출범하고 있는 AI CoE(Center of Excellence)의 성격과도 유사하다. CoE 자체는 원래 특정 분야에 대해 조직이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최적의 운영 방식을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중심 조직 또는 팀을 의미한다. AI CoE는 AI 전략 기획뿐만 아니라 교육, 거버넌스, 모범 사례 전파 등 AI를 조직 문화에 깊숙이 침투시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조직을 뜻한다. 유한킴벌리 ADC는 상설 조직이기에 임시적 성격의 AI CoE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배현정 센터장은 “AI의 결과물을 사람이 이해하고 판단할 수 없다면 기업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기업은 사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라며 “AI 결과물에 대한 원인, 현업 직원이 취해야 할 행동 등 사소한 것까지도 가랑비에 옷 젖듯 꾸준히 교육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눈앞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도 교육을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전략을 담당하는 조직은 일반적으로 기업 내에서 특별한 위치에 놓이기 마련이다. 더 빠르게 소통하고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는 만큼 조직 구조와 직책에 구애받지 않고 소통해야 한다. 관건은 이를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있다. 배현정 센터장은 무엇보다 ‘발로 뛰는’ 리더다. 그는 “많을 때는 하루에 몇 바퀴씩 사무실을 돌면서 임원, 사원, 대리 상관없이 AI 활용 현황에 대해 묻는다”라며, 그렇게 데이터를 업데이트해 나가야만 현업에 활용되는 솔루션의 가치를 명확히 파악하고 더 어려운 기술을 구현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조직을 넘어 전사적으로 AI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려면 교육뿐만 아니라 AI 거버넌스 체계도 중요하다. 유한킴벌리는 마이크로소프트 코파일럿을 표준 툴로 사용하고 다른 제품 사용을 시스템상에서 제한하는 등 내부 정책과 가드레일을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직원들 개인의 ‘윤리 의식’도 한몫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수십 년째 진행하고 있는 숲환경 공익 캠페인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유한킴벌리는 윤리 경영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는 기업이다. 이런 가치는 직원들의 자발적인 윤리 의식으로도 자리 잡았다. 배현정 센터장은 직원들의 높은 윤리 의식이 AI 행동 지침을 교육하고, AI 거버넌스를 수립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언급했다.
발 빠른 AI 도입으로 이룬 성과
그렇다면 현업 부서에 AI를 도입한 이후 어떤 성과가 구체화됐을까? 먼저 디지털 소비자 분석에서 뚜렷한 효과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소비자 분석 기술은 굉장히 고가였기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지만, AI 등장 이후 더 저렴하고 정확하면서도 빠르게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이 되고 있다. ADC의 발 빠른 주도 하에 외부 솔루션을 도입하고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뒀지만, 여기에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아예 자체 개발 역량을 내재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배현정 센터장은 이 과정에서 큰 효과를 거둬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수준으로 역량을 발전시켰다고 언급했다.
다양한 실험 과정에서 AI를 사용하기에 꼭 맞는 영역도 발견했다. 규제 준수를 위한 표시 점검 자동화다. FMCG 기업이 판매하는 제품은 식품에 비견될 만큼 엄격하게 관리되기 때문에 수많은 정부 규제를 준수해야 한다. 또한 이를 제품 패키지에 담아 소비자에게 공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보통 수천 자가 넘는 글자가 패키지와 상세 페이지에 깨알 같이 들어가지만, 정보 위배, 과장 광고 및 오타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이 일일이 정부 규제를 정리하고 수많은 제품에 반영했을 때는 오류와 누락의 가능성을 안고 작업해야 했지만, 이제는 AI로 자동화된 시스템을 통해 사전 검열 정확성을 보장하고 있다. 실질적인 업무 부담이 줄자 현업 부서의 반응도 뜨거웠다.
이처럼 현업 부서의 실제 활용도에 초점을 맞춘 솔루션들을 구축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직접 써보고 그 효과를 체감해야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문화도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배현정 센터장은 그래야만 새로운 AI 솔루션을 실험할 때도 지원을 얻을 수 있다며, 이런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라도 작게 시작해 성공 사례들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배현정 센터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한킴벌리는 “기분이 좋을 때만 쓰는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소비할 수밖에 없는 상품을 다룬다. 따라서 소비자가 일상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다. 마케팅은 1~2년의 단기 목표를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고, 소비자의 감정과 고통을 공감하고 연구하며 니즈에 부합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제품을 넘어 소비자 개개인의 추상적인 감정까지도 다뤄야 하는 만큼, 기업이 고려해야 할 범위가 다른 분야의 기업보다 더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ADC는 최근 이를 지원하기 위한 AI 어시스턴트 도입을 시작했다. 솔루션의 목적은 많은 사전 조사와 아이디어 구체화 과정에 AI의 지원을 받고, 사람을 더 중요한 영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배 센터장은 귀띔했다.
이와 더불어 배현정 센터장은 마케팅 및 연구 개발 과정의 기록도 점점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제품을 개발하거나 광고 한 편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아이디어와 논의가 오가지만, 대부분 결과물만 남고 ‘제작 과정’의 기록은 남지 않는다. 배현정 센터장은 “마치 조선왕조 실록이 없었다면 ‘1910년에 왕조가 문을 닫았다’라는 결과만 남아 어떤 건국 이념과 역사가 있었는지는 모른 채 후세대와 소통할 길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데이터가 없을 경우 AI가 소비자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할 때 원래 의도가 축소되거나 달라져 소비자와의 소통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앞으로 전개되는 AI 마케팅 세상에서 더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한킴벌리는 일상에 침투하는 생성형 AI를 피할 수 없는 만큼, 더 정확하고 윤리적으로 사용하고 소비자가 찾아볼 수 있게 제작 과정도 데이터화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는 추후 활용 가능한 데이터 기반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도, AI 거버넌스를 준비하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단계다. 배현정 센터장은 이런 기반이 바탕이 돼야 ‘차세대 디지털 마케팅’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서, 현재 솔루션 개발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Head of AI&Digital Excellence Center, Hyunjung Bae / Yuhan-Kimberly
저출산과 고령화 영향 받는 FMCG 업계··· “본질에 집중해 성장 도모”
ADC의 활약으로 다양한 솔루션을 현업 부서에 배치하고 성과를 거두면서, 유한킴벌리 내부에서는 AI와 같은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문제는 사회 환경이다. 유한킴벌리가 속한 FMCG는 저출산과 고령화 같은 사회적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분야다. 조직 차원의 대응과 함께 사회적 구조도 함께 개선되어야 하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출산율이 반등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의 깊게 대응해 가야 한다.
배현정 센터장에 따르면 여러 환경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관련 사업의 경쟁력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유한킴벌리는 기저귀 등으로 다져진 유아용품의 경쟁력을 스킨케어 등으로 확장하며 종합 유아동용품 솔루션을 구축하고 있으며, 맘큐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하기스 AI 피팅룸’ 등 유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차별화된 고객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하기스 AI 피팅룸은 ADC 센터의 전문성이 적극 발휘된 혁신 사례다.
ADC가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에는 인재 유치도 있다. IT 조직과 같이 전문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업종이 IT가 아닌 데서 발생하는 격차는 인재 유치를 특히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배현정 센터장은 이런 고민이 비단 FMCG 분야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유한킴벌리의 경우 뜻이 있는 인재와 기업에 기여하고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기업의 사회적 역할이 인재 유치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한킴벌리만 보더라도 비즈니스는 물론 사회 환경 발전에도 기여하고 싶은 인재들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 고민도 있지만, 그는 이럴 때일수록 “기업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질문하고 업의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ADC가 AI 기회 확보를 통해 달성하려는 궁극적인 목표가 “소비자를 위한 혁신”인 것도 수많은 고민 속에서 본질에 집중한 결과다. 그는 그래야만 새로운 니즈를 발견하고 고객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조언하면서, “실제 결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시도가 중요하다. 아무도 모르는 길이라 하더라도 가보지 않으면 어느 순간 간극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보는 눈은 해본 만큼, 고민한 만큼 생긴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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